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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05-10 16:24
2014. 8. 18. 09:00 생각 메모

얼마 전 세종시 교육감이 학생들을 위해 직접 쓴 시가 화제가 되었다. 그 시를 나중에 다시 읽고 싶어 스크랩 해 놓는다.

이미지 출처 : http://piki.tv/m/15770


우리반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8. 8. 13:02 생각 메모

나도 대학 때 앙드레 말로 말이 좋았다.

정확하게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이 말이 좋았다. 그래서 싸이월드 대문글로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니 내가 이 말을 쓰기에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피키캐스트 http://piki.tv/m/1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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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 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 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 날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 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 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아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 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 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 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돼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앞의 글은 10년 전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에서 고른 글이다. 


그 후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서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한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8. 3. 23:00 생각 메모

인터넷에서 글을 하나 읽었는데, 이럴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것까지 배려할 줄 아는 지도자를 만나게 될까?


한편으로는 언론도 문제다. 대통령이 현장에 자율권을 준다치고 몇시간 동안 상황파악을 잘 못하게 되면 그것도 얼마나 비판해댈까?


상황파악도 잘 하면서 자율권도 주는 그런 심오한 경지에 우리 조국이 이르게 될 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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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 링크 : http://feedproxy.google.com/~r/ppss/~3/SZgx9SuVOo8/25210


정부혁신, 국가혁신 같은 이벤트성 말장난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진정 혁신을 원한다면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정상으로 되돌리라.

답은 간단하다. 현장에 자율성을 부여하면 된다. 권한과 책임을 현장에 주고, 현장의 조치와 결과를 신뢰하며, 결과를 빌미로 현장근무자에게 책임을 떠 넘기고 처벌하는 마녀사냥 행태를 근절해야 함은 물론이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현장이 중요하고, 현장에 답이 있으니 현장에 가라고 말 하면서 실제로는 현장을 무시하는 행태가 문제의 원인이며, 현장 경험없이 탁상공론에 의존하는 상급자나 상급기관의 지휘와 감독에 의하여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생각이 혁신의 대상이다.

#1

2002년 8월 30일 태풍 루사로 인해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었다. 당시 고성경찰서 경무과장이었던 나는 마침 전국 공무원 컴퓨터 능력 경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박기선 서장(현 파리 주재관)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다.

밤 11시경 간성읍내 파출소를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침수되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한 것은 전신전화국 침수였다. 전화국 건물이 완전히 침수되는 바람에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상부로의 상황보고는 물론, 가족과의 연락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태풍 루사로 강릉도 이 꼴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아침, 한 직원이 헐레벌떡 나에게 달려오더니 “과장님, 우리 여직원 019전화가 외부와 연락이 됩니다”라며 지방청과 연락이 두절 상태인데 이 전화를 보고용 전화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다른 전화는 모두 불통인데 019는 통화가 되었다. 당시 011이나 016 전화 등과는 달리 019는 시골 지역에 별로 알려지지 않아 고성군을 통 털어도 몇 대가 되지 않아 매우 귀한 전화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 반대의 조치를 취했다. 여직원 휴대폰으로 지방청과 통화를 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아울러 외부와 통화가 된다는 사실을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지방청에서 알지 못하도록 전 직원에게 보안을 유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지방청에서 019로 통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온갖 불필요한 보고를 위한 보고를 요구할 것이고, 한 사람 궁금증 풀어 주는 일 이외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보고자료 챙기느라 현장 수습과 주민 구호 등 정작 해야 할 일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외부와 통신이 두절된 이틀 동안 공무원 컴퓨터 경진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던 중 산사태로 발이 묶였던 박기선 서장이 진부령을 걸어 청사로 돌아 올 때까지 고성경찰서 경찰관들은 상부의 불요불급한 지시와 보고로 인한 업무방해 없이 경찰관으로서 해야 할 조치와 치안서비스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만약 통신이 두절되지 않았다면, 쏟아지는 상급기관의 보고요구로 인해 정상적인 조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고가 최소화되면 업무 효율은 반비례하여 최대화된다.

#2

강릉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2012년 8월 6일 밤, 경포해수욕장에서 음주규제 근무를 하고 있던 중 강릉시 옥천동 소재 한 가구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머리 속이 온통 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백사장을 내 달려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는 이미 지역경찰과 형사들이 교통통제, 현장보존, 감식, 주변 수색 등 역할을 분담하여 체계적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켜 본 우리 형사들의 경험과 판단은 정말 값진 것이었다. 나도 사건 해결에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사건지휘에 나섰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절감했다.

오히려 사건 수사의 문외한인 서장의 지시로 인해 수사 진행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컸다. 경험으로 무장한 형사들의 판단이 더 정확했던 것이다. 그 이후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고 형사들의 수사진행을 지켜보기로 했다.

형사들은 사건 발생 신고를 접수한지 2시간 50분이 경과한 새벽 1시 30경 피의자를 특정했고, 02:25분경 피의자를 검거했다.

사건 해결을 지켜보면서 절감한 것은 현장 경험의 소중함이었다. 어떤 지식도 경험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상식의 재확인이었다. 관리자들이 특정한 사건에서 해야 할 일은 불요불급한 간섭과 신속한 보고 요구가 아니라, 현장 근무자들이 자율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과 격려로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현장에 권한을 주고, 현장의 판단을 존중하며, 결과를 문제 삼아 현장을 정치적 제물로 삼지말고 현장을 지원하라. 아울러 보고를 위한 보고로 현장을 닥달하지 말라, 그것이 혁신이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4. 16. 12:56 교육 이야기

이 글로 아이들 글쓰기 교육을 시키겠다.

http://ppss.kr/archives/19568?utm_source=feedburner&utm_medium=feed&utm_campaign=Feed%3A+ppss+%28%E3%85%8D%E3%85%8D%E3%85%85%E3%85%85%29

 

또한 내 아들에게 글을 잘쓰게 가르치겠다.

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평생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되는 최고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 링크를 했지만 혹시 원문이 사라질지 몰라,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우선 약부터 팔아야겠다. 내 글쓰기 강의 들은 분들이 남긴 수강후기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1 글쓰기 특강을 들으면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강사님이 들려주시는 다양한 예로 강의 내용 하나하나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글쓰기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강기간 중 번번이 떨어졌던 지원서에 디테일을 살린 자기소개서로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정말 유용한 강의였습니다.

#2 이 글쓰기 강의는 제가 지금껏 듣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다른 글쓰기 강의의 경우 글을 쓰는 스킬이나 테크닉들을 가르쳤다면 이 글쓰기 강의는 우리가 글을 쓰는 목적과 내용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는 수업입니다.

#3 솔직한 마음으로 난 이 수업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다. 나와 수업을 함께한 사람들만이 소유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수업을 함께 들은 사람들도 그 때 수업내용을 까먹었으면 좋겠다. 강추하지만, 공유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수업은 그런 수업이다.

한 번도 자기소개서가 통과된 적 없는 취업준비생이 내 강의를 듣고 처음으로 자기소개서 합격통보를 받았다. 글쓰기에 전혀 관심 없던 고등학생이 내 강의를 듣고 교내 자기소개서 과제에서 제일 잘 썼다는 칭찬을 받았다. 나는 경희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수업시간에 자기소개서 쓰는 방법에 대해서 서비스로 가르쳐줄 때가 있다. 2013년 2학기 때 내 강의를 듣는 한 학생이 현대중공업에 합격했는데, 인사치레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자기소개서 쓰기 강의가 큰 도움이 됐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자! 이제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을 준비가 됐는가?

 

추상적 단어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자기소개서가 통과되려면 내 글로 면접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쓴 이야기로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전해야 한다. 내가 쓴 기획서가 통과되려면 팀장의 마음이 동動해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제 내 글로 여러분을 한 번 슬프게 만들어보겠다. 내 몸 안에 흐르는 모든 슬픈 기운이여!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열 손가락 끝으로 모여라. 손가락 끝이 욱신거린다. 슬픔을 느낀 손가락 부위의 체세포들이 분자 단위로 요동치고 있다. 이제 그 모든 슬픔을 모아서 쓴다.

“슬프다……”

자! 여러분, 내가 쓴 ‘슬프다……’라는 글을 보고 슬퍼지는가? 아마 짜증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뭔가 기대했는데, 역시 약팔이는 믿을게 못 된다고 침 뱉는 소리가 들린다. 그 침을 자기 자신에게 뱉기 바란다. 왜냐고? 내가 연출한 장면이 사실은 바로 당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슬플 때 뭐라고 쓰는가. 혹시 ‘슬프다’라고 쓰지 않나?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슬프다’라는 단어는 절대로 슬프지 않다는 사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그리고 슬플 때 그저 ‘슬프다’라고만 써버린다.

이런 느낌이랄까...

이런 느낌이랄까…

 

사랑의 리퀘스트가 ARS를 누르게 하는 법

사랑의 리퀘스트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분들의 사연을 전하고 ARS를 통해 시청자에게 모금을 하는 자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 분은… 정말 대단히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입니다. 정말 가난합니다. 불쌍하지요. 너무나 슬프군요. 자… 시청자 여러분! ARS 번호 눌러주시면 이분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대부분 ARS 번호를 누르지는 않을 것이다. 가난하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슬프다, 등의 말은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가난하단 말인가? 뭐가 안타깝단 말인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ARS 버튼을 누를까?

TV 화면이 온통 검다. 그런데 정적을 깨고 자명종 소리가 울린다. 순식간에 화면이 밝아지며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절대 프렌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아니다. 백열전구다.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구를 비추던 화면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자 내의 차림의 40대 남성 한 명이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고 있다. 내의 오른쪽 옆구리 쪽에는 나 좀 보란 듯 구멍이 나 있다. 화면은 좀 더 아래쪽을 비춘다. 이 남자가 자던 자리 옆이다.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며 뭘 먹는 꿈을 꾸는지 헤벌레 하고 있는 꼬마 세 명이 크레용 세트처럼 나란히 자고 있다.

남자는 다시 잠을 청하는 몸을 이끌고 방문을 나선다. 문을 열자 느닷없이 간이 부엌이 나오는데 앞에는 연탄보일러가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웅변하고 있다. 다세대 주택의 지하 단칸방. 밥상을 차리는데 그제 한 밥이 쉬어터지기 바로 직전이고, 반찬은 5개? 2개? 그렇다. 2개다. 김치와 멸치.

헤벌레 웃던 아이들은 잠이 깨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진다. 마치 현실보다 꿈을 더 선호하는 듯한 얼굴. 40대 남성이 차려준 밥상 주위로 약속이나 한 듯 제자리 찾아 앉은 아이들은 레미콘 차량이 공사장에 콘크리트를 들이붓듯 밥과 반찬을 우겨 넣는다.

40대 남성이 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챙겨서 학교에 보낼 동안, 이상한 건지 어쩌면 당연한 건지 성인 여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집 나간 지 3년 됐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이 남성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추리닝 바람으로 어기적어기적 집을 나선 이 사람은 마치 약속된 코스가 있는 듯 정확하게 취업정보지가 있는 곳만을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손에는 두툼한 정보지 뭉치가 들려 있다. 전화기를 붙잡고 돌리기 시작하는데…

방송을 보며 한숨을 쉬는 시청자들이 늘어난다. 벌써 ARS 번호 누르고 있는 분들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숙련된 발음으로 정확하게 ‘가난하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슬프다’라는 용어를 전달했음에도 꿈쩍도 안하던 사람들이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ARS 번호를 눌러대고 있다. 감동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디테일’에서 오기 때문이다.

내 글로 사람을 슬프게 만들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언제 어떻게 슬퍼지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을 알아야 이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사람을 알아야 이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생생함과 감동은 ‘구체성’에서 온다

내가 글쓰기를 가르칠 때 항상 내는 과제가 있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 쓰라는 것이다. 평가기준을 제시하는데, 맞춤법이나 문장력 따위는 절대 아니다. 내가 과제글을 읽은 후 ‘진짜 이 분은 이런 장점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그런데 과제글을 읽다보면 이렇게 쓰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저의 장점은 협업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 방송부의 부장으로 활동하였을 때 방송부의 인원이 부족해 행사진행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행사를 앞두고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제가 영상디자인부와의 협업을 제시하였습니다. 기존 구성원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효율성을 내세워 설득한 후 체계적인 역할 분담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팀워크가 잘 맞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원만한 협업을 위해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려 합니다. 이런 저의 장점을 가지고 동료·선배·사회와 협력하여 조직의 목표가 실현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제 글쓰기를 하면서 과제로 제출받은 글이다. 이 글의 문제는 무엇일까? 영상디자인부와의 협업을 제시했다는데, 무슨 협업인지 떠오르는가? 전혀 모르겠다. 기존 구성원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는데, 도대체 상대편이 내 뺨을 때려서 틀어진 건지, 아니면 약속시간에 늦어서 그런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효율성을 내세워 설득한 후 체계적인 역할 분담을 했단다. ‘효율성’ ‘체계적인 역할 분담’ 같은 추상적 단어로는 도무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 어떤 면접관이 이 자기소개서를 읽고 ‘참 이 친구는 협업을 잘 하겠구먼’이라고 생각할까? 면접관 대부분은 50대 넘는 임원들이 아닌가. 만약 협업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이를 헛먹은 것이다. 이 글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no information’ 그야말로 아무런 정보가 없는 글이다. 디테일이 없으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다른 자기소개 글을 보자. 좀 길지만 차분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역시 글쓰기를 가르칠 때 과제로 제출받은 글이다. 오타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살렸으니 이해 바란다.

어머니는 다른 또래들에 비해 말 배우는 것이 느리고 어눌하게 말하는 저를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잘 못 말하는 부분을 지적해 주시고 바른 발음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키며 노력했었지만 차도가 없자 4살 때부터 대구계명문화대 대명캠퍼스 네거리에 있었던 언어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책상이 가운데 놓여 있었고 내과에서 볼 법한 차가운 쇠 막대기, 수술용 장갑, 수십 장의 단어카드, 거울, 녹음기가 놓여있었습니다. 구석 책장에는 한 층이 전공책으로 가득 채웠고 나머지 공간은 소리가 나는 장난감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 방에는 삼십대 후반의 남성분이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남성분은 수술용 장갑을 낀 손으로 제 혀의 위치를 바로 잡아주시고 똥누는 소리 내지 말라며 자연스러운 발음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켰습니다.

맘같아서는 정확한 발음을 해서 빨리 답답하고 무서운 언어치료실에서 나와서 건너편 편의점에서 파는 딸기맛 쉐이크를 먹고 싶었습니다. 빨리 나가고 싶어서 열심히 했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늘 찌푸렸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입과 혀가 내 맘 같지 않아서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과정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당시 더이상 어눌한 말투때문에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기 싫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제가 종이를 붙이려고 친구에게 풀을 빌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친구가 못 알아 들은 듯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 그 친구는 피식 웃은 채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날 “풀 좀 빌려줄래?”를 열 번도 넘게 말했습니다. 상당히 수치스러웠고 화가 났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목이 쉬어 버리고 안면 경련을 참아가며 10년을 보내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오기가 몸에 베였습니다. 앞으로 프로젝트를 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지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 글을 읽고 언어치료실을 찾아갈 수 있다. 대구계명문화대 대명캠퍼스 네거리에 있다하지 않나. 세 평 정도의 공간이었단다. 똥 누는 소리 내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으며, 빨리 끝내고 딸기 맛 쉐이크를 먹고 싶었다는데 말이다. 언어장애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얘기를, ‘풀 좀 빌래줄래’를 열 번도 넘게 말했다고 ‘디테일하게’ 회상한다.

솔직히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비문도 속출하는 글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으면 ‘이 분은 언어장애를 이겨낼 정도의 의지력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맞춤법, 문장력 떨어지는데도 말이다. 이 글은 50대 너구리 면접관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풀 좀 빌려줄래’를 열 번도 더 말했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감동은 어디서 나온다고? 잊지 말고 기억하시라. ‘디테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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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도 이 정도 생생한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글쓰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마라

취업 자기소개서를 쓸 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선가 모범 자기소개서를 구해 거의 그대로 도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한지, 내 페이스북 친구인 한 언론사 편집장이 자기소개서를 검토하면서 절반 가까이가 장점을 ‘경청’이라고 했다고 타임라인에 한숨을 내쉰다.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내용에 과연 ‘디테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내용이라면 얼마나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을까? 혹시 자기소개서 써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발 부탁하는데, 자기소개서는 직접 쓰시라.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서 말이다. 그래야 면접관의 마음이 움직일 것 아닌가.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 드리죠. ‘봄’에 대해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지 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세요. ‘사랑’에 대해 쓰지 말고 사랑할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 쓰세요. 감정은 절대로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전달되는 건 오직 우리가 형식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뿐이에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면 앞으로는 봄에 시간을 내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애인과 함께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그 맛이 어땠는지, 그날의 날씨는 어땠는지를 기억하려 애쓰세요. 강의 끝.” -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마음산책, 2010)

소설가 김연수의 이 글이 진리다. ‘슬프다’라는 단어는 절대 슬프지 않다. 슬픔을 표현하려면 슬펐던 경험을 ‘디테일’을 살려 자세히 써야 한다. 제주 여행 다녀온 다음에 ‘제주도 풍경이 너무 멋있었어’라고 말하면 어떡하나? ‘멋있었어’는 추상적인 단어 아닌가. ‘멋있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내가 본 것, 냄새 맡은 것, 맛 본 것, 손끝으로 느낀 감각을 써줘야 할 것 아니겠나.

사람이란 존재는 오감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통해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그렇다면 내 글로 무엇을 해야 할까? 내 글로 내가 본 것을 생생하게 보여줘야 한다. 내가 냄새 맡은 것을 냄새 맡게 해줘야 한다. 내가 느낀 촉감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글쓰기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더 잘 이해할수록 글을 더 잘 쓰게 된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는 소년은 소녀가 죽어서 ‘슬펐다’는 얘기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눈물 콧물 다 쏟는다. 그저 소년과 소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디테일하게 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20대 시절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봤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걸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샐리: 미안하지만 해리, 송년의 밤이고 외롭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냐. 이런 식으론 안 돼.

해리: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샐리: 몰라. 하지만 이런 식으론 안 돼.

해리: 그럼 이런 건 어때? 더운 날씨에도 감기에 걸리고,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데 한 시간도 더 걸리는 널 사랑해. 날 바보 취급하며 쳐다볼 때 콧등에 작은 주름이 생기는 네 모습과 너와 헤어져서 돌아올 때 내 옷에 배인 네 향수 냄새를 사랑해. 내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너이기에 널 사랑해. 지금이 송년이고 내가 외로워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냐. 네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고 싶다면, 가능한 빨리 시작하란 말을 해주고 싶어.

샐리: 이것 봐, 넌 항상 이런 식이야 해리! 도저히 널 미워할 수 없게끔 말하잖아. 그래서 난 네가 미워, 해리. 네가 밉다고.

대학시절 궁상맞게 혼자 비디오방에서 보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해리가 샐리에게 건네는 대사는 그것이 도저히 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디테일’이 살아 있다. 덕분에 샐리의 마음은 완전히 연두부가 되고 만다. 사랑도 쟁취하는 대단한 ‘디테일’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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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골남자
2014. 3. 30. 20:44 생각 메모

아무리 대단한 기업의 CEO라도 미합중국의 대통령만큼 중압감을 받진 않을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8년간 눈에 띄게 늙었습니다. 그래도 예전 친구들을 잊지 않았고, 꾸준히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했으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대통령 가족의 특권에 젖어들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012년 ‘오바마 가족 (The Obamas)’을 쓴 뉴욕타임즈 기자 조디 캔터와 오바마 대통령이 어떻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지 들어봤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책을 보면 오바마 가족은 백악관에 들어간 후에도 예전 라이프스타일을 지키려 부단히 노력한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기업에서든 정치에서든 일반적인 사람들은 서서히 지위가 올라가면서 조금씩 라이프스타일이 변하죠. 그러나 대통령이 되면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박물관, 회사, 집, 군대를 합쳐놓은 것 같은 백악관에서 살게 되고, 세상 모두가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죠.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이 된 이후에도 살고 있던 시카고에서 이사가지 않고 워싱턴 D.C까지 출퇴근했습니다. (역자주: 비행기 1시간 30분 거리) 놀라운 건 미셸 오바마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백악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딸들이 시카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는 겁니다. 미셸 오바마가 워싱턴 정치와 영부인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얕고 순진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백악관에서의 삶이 굉장히 어려울 거란 걸 이미 직감했다는 데서 그녀의 현명함을 보여주기도 하죠. 대통령 가족은 직업입니다. 대기업 총수의 부인이 사회적인 일에 나서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처럼 가족이 모든 일에 연관되고 노출되지는 않죠.

2012년 쉐릴 샌드버그가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5시반에 회사를 떠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저녁식사는 어떤가요?

사람들은 오바마가 6시 반을 가족과의 저녁식사 시간으로 정해놓고 이 규칙을 엄격히 지킨다는 사실에 매우 놀랍니다. 대통령으로서 공무가 바쁘니 일주일에 두 번까지는 놓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 된다는 게 오바마 대통령의 원칙입니다. 물론 식사 후에는 다시 일을 하겠지만요. 이는 역대 대통령 사이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선거 자금을 걷기 위한 여행을 줄여야 하고, 의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작아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선을 그을 때 놓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는 CEO들이 선을 그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나 어디까지가 자신의 가치이고 지켜야하는 경계선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쉐릴 샌드버그는 맞는 배우자를 고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커리어 결정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에게 미셸도 그랬나요?

미셸 오바마가 없었다면 버락 오바마는 현실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먼저 현실적으로 버락 오바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 고향이라 부를만 한 정치적 기반이 없죠. 미셸 오바마는 시카고 토박이로 오바마에게 정치적 뿌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미셸은 항상 그녀의 남편이 다른 정치인 같지 않고 굉장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이는 그의 자아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통령 주위에서 그를 떠받들 때마다 영부인이 부드럽게 일침을 놓는 장면이 책에 생생히 묘사되어있습니다. 그 역학관계가 왜 중요합니까?

큰 힘을 가진 사람 주위에 있으면 지원하고 뒷받침해주는 것 못지 않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집에 와서 ‘당신은 그 회의를 다르게 진행했어야 해요.” 같은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아담스, 루즈벨트, 클린턴 부부 등 부드럽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영부인 이야기는 많죠. 그러고 보니 CEO 아내가 이 역할을 수행한 사례도 연구가 진행되면 좋겟네요.

작년은 오바마 정권에게 유난히 힘든 한 해였습니다.여전히 일과 삶의 균형을 잘 지키고 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네요. 오바마는 여전히 쿨하고 주위 돌아가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 대통령 이미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일을 엄청 열심히 하고 있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죠. 오바마는 큰 연설을 앞두고서는 꼬박 밤을 새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전쟁과 경제 침체 속에서 심리적인 압박도 대단하리라 추측되고요. (Harvard Business Review)

http://newspeppermint.com/2014/03/09/obama-life-bal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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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골남자
2014. 3. 30. 17:08 생각 메모
시간이 흐른 나중에도 읽으면 좋을 것 같은 글을 스트랩 해 놓는다. 출처는 마지막 링크

클리앙분들, 너무 고된 삶을 살지 마셨으면 합니다


클리앙에서 제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글이 남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하지 마라라는 훈계조의 글인데 오늘 제가 그런 글을 쓰고 마는군요. 우선 사과드립니다.

최근에 알바왕으로 불리며 갖은 고생을 하며 알바로 생계유지와 빚청산을 하신 분의 죽음의 소식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약 10년이 안되는 예전에 꽤 많은 4억 가까운 빚을 진 일이 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나와서 제 노력과 능력 하나 믿고, 사업을 무리하게 했던 것이 큰 실수였지요.

그 당시에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주변에서 저에게는 격려 뿐이었습니다. "그래 잘 시작했어, 너처럼 그렇게 중독자처럼 일할거면 자기 일하는 것이 오히려 좋겠다" 이런 말들이 많을 만큼,

회사 다니는 동안에 저는 누구보다 많은 업무량을 누구보다 많은 일과 시간을 투자해서 처리하였습니다. 그렇게 일했던 것은 잘못된 조직의 문화와 그 잘못된 문화에 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제 자신의 비겁함이 더해져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1년에 한번 있는 우수직원상을 받는 것이 좋았고, 오너십이 강한 조직에서 오너에게 인정의 목소리를 한번 듣는 것에 중독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에게는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 지인들의 인정과 저의 노력과 열정을 믿고 무작정 뛰어 들었던 사업의 현실은 정말 냉혹하였던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4억에 가까운 빚, 정리를 해도 절반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될때까지 저는 비전이라는 이름의 만용을 잊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당장 수중에 현금이 매일매일 들어와야만 하는 날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예전에 글을 쓴 일도 있지만, 그런 날들이 너무 힘들어서 그라목손 들어 있는 농약먹고 죽을 생각도 했습니다. 손을 벌벌 떨면서 약병을 손에 쥐고 얼마나 오래 공원에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이겨내고, 아침에는 우유배달부터 시작해서, 노점, 목욕탕 청소,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 제 기억에 하루 2시간 정도 잠 잘 수 있는 시간의 틈이 생기더군요. 이 시간은 어떻게 다른 일로 채우지를 못하고 죽은듯이 잠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닥에 떨어져보고 알게 된것은 저와 같은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 분들과 죽으려하는 하는 분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노숙하는 분들 사이의 거리는 종이 한장 만큼의 차이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빚도 청산하고, 가족도 다시 한곳에 모일 수 있었고, 지금은 안정된 생활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 고통 뒤에 또다른 개인적인 고난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병을 얻은 것인데요, 사실 이 글에서 하고 싶은 것은 이 부분입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뇌에 암이 생겨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약 2년 쯤전의 일 같습니다. 여러번 이야기를 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병을 안 순간 시한부 선고를 받는 다는 것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2년 동안 방사선 등의 치료를 받고, 정말 고통스러워서 수술이 가능하다면 수술을 해달라, 수술중에 죽어도 괜찮다는 부탁을 했음에도 수술이 불가한 부위라는 말에 자포자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치료하는 동안에 병원에서 같은 치료를 받으면 알게된 환우들도 몇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저보다 연배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분들이 몇 있습니다.

한분은 환갑을 넘기신 분이었는데, 저와 비슷한 질병과 부위로 오랫동안 치료와 휴식을 반복하였습니다. 작년말에 결국은 돌아가셨는데, 그러기 한달전에 병원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본인이 젊은 시절 너무도 많은 욕심과 아집 때문에 뒤도 안돌아보고 다른 사람들 피눈물로 쌓아 올린 재물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 것 같다는 말씀에, 저는 당치도 않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런 법이 있다고 해도 믿고 싶지도 않고, 질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무 이유없이, 최소한 인과관계는 있겠지만, 질병은 징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해주신 말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징벌이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징벌이라는 것이었죠. 요약하면.. 나를 아끼지 못하고 나 조차도 내 몸 하나도 도구로 생각하고 사랑하지 못하였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저는 그때까지 그런 생각을 못하다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죠. 지나친 욕심에 얻는 실패와 만회의 시간 동안의 저의 고집이 저의 병을 만드는 것에 분명 일조했던 것입니다.

2년 동안 저는, 제 기억에는 5분의 환우를 떠나 보냈습니다. 모두가 마지막까지, 최후의 한숨까지 어렵고 힘들게 뱉어내다가 눈도 못 감도 떠나셨습니다. 오랜 고통과 앞을 알 수 없는 치료를 뒤로 하고 드디어 안식을 맞이하는 순간이 평화로울 것 같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생에 대한 애착을 쉽게 내던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더군요. 저 역시 그럴 것 같아서 늘 걱정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은 병을 많이 이겨냈습니다.)

제가 이 분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한 것이 현재 제가 속한 조직의 야근을 완전히 없앤 것이었습니다. 6시면 알람이 울리고 삼십분뒤면 조명 전원을 내립니다. 회사 버스도 출발 시간을 앞당겼습니다. 

가끔 정말 급한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두명이 급하게 남을 경우는 있지만, 이제 조직 전체는 각자 저녁이 있는 삶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그뒤로도 기울지 않고 늘 매출 목표를 잘 달성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업종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어려운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클라이언트가 있고, 긴급한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예전의 저처럼 저를 혹사시키고,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고, 매일매일 전쟁처럼 일을 해치우는 생활을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잃은 것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눈에 띄는 것이 없네요.

이제서야 제목의 말을 드리게 되네요. 그래서 클리앙에 계신 분들은 너무도 고된 삶을 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너와 상사의 칭찬과 격려에서 비록 희열이 충전된다고 해도, 그것이 긴 인생을 놓고 보았을때 저녁이 있는 삶, 나를 아끼는 삶보다 가치 있을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선택한 순간부터 모든 프로젝트는 늘 바쁘고, 마감까지의 시간은 상상도 못하게 여유없이 불가능할 것이고, 그 다음번도, 또 그 다음번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클리앙의 젊은 분들은 자신을 조직안에서 어쩔 수 없는 소모품으로 스스로를 태워 없애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많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빨리 업무를 처리하고 눈치 받지 않고 내 개인 시간을 쓰는 것이 정신적으로 덜 소모적인 삶이 될지모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긴 시간을 놓고보면,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삶은 무의미한 시간으로 남기 쉽습니다.

지금 시간에도 말도 안되는 업무량을 놓고 뒤 돌아보고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업무에 매진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주일을 철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도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얻게 되는 불명예와 약속을 어긴 무책임 뒤에 받게 되는 질타와 잘못된 커리어 관리가 가져올 무시무시한 미래가 더 걱정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을 계속 선택하면, 언젠가는 삶이 그런 분에게 휴식 티켓을 보내주게 될 것입니다. 그 티켓이 저처럼 암일수도, 실직일수도, 스스로 얻게 되는 자괴감이 될수도 있겠지요.

부디 지금 선택의 기회와 권리가 있는 분들이 스스로를 아끼고 지킬 시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금전도 칭찬도, 찬란한 비전도, 권력도 중독되고 도취되기 쉬운 삶의 함정이자 또한 동시에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함정에는 빠지지 마시고, 삶의 요소로서 필요할때만 살짝 맛보는 것이 삶의 성찬을 즐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돌아가신 분이 하고 싶었을 유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서 없이 적었습니다. 가신 분이 빚을 다 갚은 뒤에도 험난하고 고된 방식을 지키셨던건 단지 욕심 때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청산의 시간동안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진 마음의 빚도 갚아가던 중에 떠나신 것이라 생각하니 맘이 무겁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3. 12. 8. 22:24 생각 메모

원본 글은 여기

http://acase.co.kr/2013/11/22/writinglecture5/

혹시 몰라 밑에 스크랩 해 둠.

왠지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읽고픈 글


음주 글쓰기는 반칙이다.

- 술기운에 글 쓰지 말자

시인 고은은 시 전문지 <시평> 기고 글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이제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었다. 막말로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아마 두 대통령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술을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직원들도 금주하기를 권했다.
특히 담배 냄새 나는 장관이나 수석들은 자기 관리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직접 표현은 안했지만, 킁킁 냄새 맡는 시늉으로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그래서 흡연자가 대통령을 뵈러갈 때는 양치질은 물론, 가글까지 하는 게 필수였다.
하물며 술 냄새야.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개방적이었다.
심지어 인수위 직전까지만 해도 당선인과 같이 담배 피우는 것이 허용이 될 정도였다.
임기 초, 대통령과 대단히 가까운 분과 저녁식사 자리가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대통령께서 담배를 한 대 무셨다.
그러면서 동석한 연하의 그 분에게 그런다.
“이제는 같이 담배 피우는 것 안 됩니다. 내가 대통령이니까.”
우스갯소리를 한 후, 그래도 미안한지 한 마디 덧붙인다.
“너무 야박하지? 한 대만 피우게.”
이렇게 소탈했다.

대통령은 글 작업을 할 때 담배를 유독 찾았다.
여사께서 회의실에 담배를 갖다 놓지 말라 엄명을 한 터라, 대통령이 담배를 찾으면 회의실 관리하는 직원이 접시에 딱 두 개비만 담아 가져왔다.
그런 제한 역시 여사의 당부가 있었다.
대통령은 두 개비를 다 피우면 꽁초를 잘 펴서 피웠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꽁초를 펴든지.
동석한 골초 참모들은 담배가 당겨 침이 꼴깍 넘어 갔다.
회의가 길어져 꽁초마저 없어지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 담배 가진 사람 없나요?”
대통령은 얇은 담배를 피우셨는데, 이렇게 찾을 때는 굵은 것도 상관없었다.

이전 대통령에게는 전매청에서 대통령 전용 담배를 만들어 공급했다.
금색 봉황 휘장이 그려진 담배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물론 담배 품질도 최고 등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국산 ‘에세’를 사서 피웠다.
라이터도 시중에서 500원에 파는 일회용 플라스틱 라이터를 썼다.
봉하마을 구멍가게 사진에 나온 그 담배와 라이터다.

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노 대통령 역시 술은 멀리 했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한두 잔 거드는 정도였다.
하지만 각종 술의 유래와 제조 방법 등에 관해선 어찌나 해박하던지.
술자리는 대통령의 술 얘기만으로도 흥이 났다.

술 예찬론을 펴는 문인들이 많다.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술만큼 좋은 건 없다.
술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묘약이니까.

하지만 술을 마시고 글을 쓰는 건 문제다.
그건 반칙이다.
청와대 시절 체득한 음주 작문의 폐해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2006년 11월, 독일 유력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의 요청으로 대통령이 “역사는 진보한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준비할 당시였다.
어느 날 오후, 예정에 없이 대통령이 찾는다.
그날따라 점심에 술을 한 잔 했다.
찾아뵈러 가니 부속실 직원이 술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대통령이 회의실에 오셨다.
한 두 마디 건네시더니,
“오늘은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안 되겠다. 다음에 하자.”고 한다.
술 냄새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 내색을 안했다.
아랫사람 무안할까봐. 아니 문책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어찌나 죄송하든지.

2005년, 제60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준비할 때였다.
천신만고 끝에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연설문 작성이 마무리되었다.
대통령과의 독회만 7~8차례, 서너 개 버전의 연설문이 만들어졌다 지워졌다를 반복했다.

광복절 연설문 준비는 일 년 중 가장 큰 전투다.
남들 바캉스 가는 한여름에 더위와 싸워가며 악전고투해야 한다.
보름 정도를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식욕도 뚝 떨어진다.
오직, 자나 깨나 8월 15일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린다.
오죽하면 지금도 광복절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짓눌린 느낌을 받을까.

드디어 그날이 왔다.
8울 14일 저녁 무렵,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계속 붙들고 있으면 끝이 없겠다.”
대통령의 이 한 마디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끝났다는 해방감에 연설비서실 모두 삼청동 술집으로 달려갔다.
소주 두 병 가까이 마셨을 즈음, 대통령의 전화가 왔다.
시간을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근데 말이야. 경축사 끝 부분 수정 좀 하세.”
나는 눈빛으로 메모지를 찾았다.
행정관 한 사람이 식당 메모지를 가져 왔다.
한두 마디 할 줄 알고 적기 시작한 것이 40분을 훌쩍 넘었다.
“이렇게 고쳐서 내일 아침 일찍 보세.”
술집을 나와 비서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사무실에 오니 밤 11시가 넘었다.
절대고독!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그랬다.
“사랑하는 아내가 원고지 한 장 대신 써줄 수 없고, 사랑하는 아들도 마침표조차 대신 찍어줄 수 없는 게 글쓰기라고.”
전화는 나 혼자 받았으니, 행정관들은 무슨 말씀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문제는 메모한 것을 보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보겠다.
‘사고 났다.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큰 연설인 광복절에서 대형사고를 치게 됐군.’
걱정에 앞서 자괴감이 들었다.
‘대통령은 늦은 시간까지 고심 하다 이거다 싶어 전화까지 했는데, 술 먹다가 이 지경이 됐으니.’
글자 해독을 포기하고 창작에 들어갔다.
‘평소 하던 말씀 참고해서 쓰면 되고, 어차피 내일 아침에 고쳐줄 테니까.’

밤을 꼴딱 새우고 7시 전에 관저에서 대기했다.
대통령이 들어왔다.
“왜? 어제 내가 다 불러주지 않았든가.”
“한 번 보자고 하셨습니다.”
“됐다 마. 어련히 알아서 잘 썼을라고. 이제 신물이 난다. 치와뿌라.”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보여드릴 수도 없지 않은가.
사무실로 내려 와 TV를 켰다.
몇 시간 후에 있을 광복절 실황중계를 기다리는 수밖에.
마침내 바로 그 대목, 대통령께서 수정 지시를 했던 연설의 마무리 부분을 읽는다.
나는 원고를 읽는 대통령의 눈빛을 뚫어져라 봤다.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 잘못 썼구나.’
하지만 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뵀지만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잘못 쓰지는 않았나 보군.’

세월이 흘러 퇴임을 6개월 여 앞둔 오찬 자리.
비서관들과 식사를 하다가 2005년 광복절 얘기가 나왔다.
이러저런 말씀을 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대통령의 한 마디.
“그때 말이야. 다 좋았는데 연설문 꼬랑지가 사라졌어. 분명히 내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서 나를 보셨다.
대통령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른 체 해줬을 뿐.

술 먹고 글 쓰면 안 된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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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골남자
2013. 10. 20. 14:24 생각 메모
내용이 좋아 나중에 다시 읽고자 기록함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607653.html


엘에이(LA) 다저스가 ‘에라이 다 졌스’가 되기 직전 기사회생해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간신히 두번째 승리를 따낸 아침에 이 글을 쓴다. 육상효 감독이 엊그제 트위터에 재잘대시길 “다저스 경기 보다가 화면에서 3루 앞자리에 앉은 선배를 봤다. 궁금해 그 자리가 얼마인지 문자로 물었더니 답이 왔다. 600달러. 흠.” 그런데도 5만6000석 다저스타디움엔 오늘도 빈자리가 없었다. 흠.

요 앞에서 던진 공을 나무방망이로 얼른 받아 치는 놀이가 대체 뭐라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돈을 써가며 매일 모여드는 걸까? 영화 <미스터 고>의 대사처럼 “집(home)에서 출발해 집(home)으로 돌아오는 경기”라서?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가 남긴 유명한 말대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란 걸 보여주는 스포츠라서?

그런 흔해 빠진 말보다 훨씬 더 근사한 대사로 야구의 매력을 속삭이던 영화를 나는 알고 있다. 존 큐색이 주연한 작고 예쁜 영화 <화성 아이, 지구 아빠>(2007). 자기가 화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6살 아이 데니스와 그 아이를 입양한 싱글 대디 데이비드의 이야기. 둘 사이의 서먹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 볼 요량으로 아이를 야구장에 데려간 날, 세상에서 가장 심드렁한 여섯살배기의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이에게 아빠가 말한다. “야구가 좋은 이유가 뭔지 아니? 10개 중에 3개만 쳐도 스타가 된다는 거야. 그것보다 조금만 더 잘 치면, 아주 조금만 더 잘 치면 슈퍼스타지.”

데니스는 좋게 말해서 괴짜, 하지만 또래의 언어로 말하면 ‘찐따’. 데이비드는 조금 ‘다른’ 아이를 자꾸 ‘틀린’ 아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 때문에 속상한 아빠였다. 그래서 아이를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10번 중에 7번 실패해도 괜찮아, 10개 중에 3개만 받아 쳐도 잘하는 거야, 야구는 그래, 인생도….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보자꾸나. 아빠는, 그리고 야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넌 이제 겨우 한번의 헛스윙을 했을 뿐이라고, 세상이 너에게 던진 강속구를 멋지게 받아 칠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말이다.

<더 팬>(1996)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아빠가 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이유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모든 걸 야구에 빗대 말하는데, 어린 아들에게 희생의 가치를 가르칠 때도 이런 식이다. “야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플레이는 희생플라이야. 왜 그런지 아니?” “팀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니까요?” “그렇지. 그 대신 아웃을 당했는데도 타율이 낮아지진 않아. 희생플라이는 타율 계산에서 빼주기 때문이지. 그래서 야구가 인생보다 낫다는 거야. 야구는… 공평하거든.”

야구는 공평하지만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희생플라이를 날려 보내고도 박수받지 못한 아빠. 회사를 위해 열심히 희생번트를 댔지만 그걸 실적 계산에서 빼주지 않아 해고당한 아빠. 결국 벼랑 끝에 내몰린 아빠가 선수 한명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누군가로부터 단 한번만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하지만 그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맞이한 인생의 9회말에 끝내 역전 만루홈런의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으니. 점점 더 야박해지는 세상의 룰에 짓눌릴수록 야구의 너그러운 룰에 자꾸 더 열광하게 되는 자의 인생이란, 그저 쓸쓸하고 안쓰러운 것이었다.

가을이다. <머니볼>(2011)의 한 장면에도 다시 마음이 머무는 계절이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브래드 피트)가 어떤 선수의 자료 화면을 살펴보던 장면. 한 선수가 공을 친다. 힘껏 달린다. 마음이 급해서 1루를 돌다가 넘어지고 만다. 허둥지둥 흙바닥을 기어서 다시 1루로 돌아오는데 1루수가 웃고 있다. 주루 코치도 웃고 있다. 그제서야 고개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는 선수. 이런, 그가 친 게 홈런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뒤늦게 베이스를 도는 선수의 뒷모습. 어쩌면 꼭 나의 뒷모습인 것만 같아 더 측은해 보이던 그의 등번호 5번.

자신이 친 공이 펜스를 넘어갔는지 확인해 볼 여유도 없이 오늘도 허둥지둥 흙바닥을 기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 세상은 어김없이 강속구를 뿌려댄다. “야구가 좋은 이유가 뭔지 아니? 10개 중에 3개만 쳐도 스타가 된다는 거야. 그것보다 조금만 더 잘 치면, 아주 조금만 더 잘 치면 슈퍼스타가 되지.” 조금은 위안이 되는 이 대사를 외우며 타석에 선다. ‘3할의 미학’이 부디 야구장 밖에서도 통하는 룰이 되기를 염원하며 힘껏, 10월의 오후를 휘둘러 본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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