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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11:15
2014. 8. 18. 09:00 생각 메모

얼마 전 세종시 교육감이 학생들을 위해 직접 쓴 시가 화제가 되었다. 그 시를 나중에 다시 읽고 싶어 스크랩 해 놓는다.

이미지 출처 : http://piki.tv/m/15770


우리반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8. 8. 13:02 생각 메모

나도 대학 때 앙드레 말로 말이 좋았다.

정확하게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이 말이 좋았다. 그래서 싸이월드 대문글로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니 내가 이 말을 쓰기에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피키캐스트 http://piki.tv/m/1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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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 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 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 날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 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 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아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 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 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 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돼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앞의 글은 10년 전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에서 고른 글이다. 


그 후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서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한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8. 5. 13:17 생각 메모

"나는 너를 만나게 되서 반가웠어."


요즘 jtbc 비정상회담을 즐겨보는데 2회 때 벨기에 청년이 한 말이다.

자기 어머니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다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머리 속에 멤돈다.


나는 아들과 이 세상에서 만난 것이다.

아들은 내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만난 아들과 재미있게 잘 지내보자!


나도 아들이 크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아들, 나는 너를 만나서 참 좋고 행복하다."



나는 너를




posted by 시골남자
2014. 8. 3. 23:00 생각 메모

인터넷에서 글을 하나 읽었는데, 이럴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것까지 배려할 줄 아는 지도자를 만나게 될까?


한편으로는 언론도 문제다. 대통령이 현장에 자율권을 준다치고 몇시간 동안 상황파악을 잘 못하게 되면 그것도 얼마나 비판해댈까?


상황파악도 잘 하면서 자율권도 주는 그런 심오한 경지에 우리 조국이 이르게 될 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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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 링크 : http://feedproxy.google.com/~r/ppss/~3/SZgx9SuVOo8/25210


정부혁신, 국가혁신 같은 이벤트성 말장난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진정 혁신을 원한다면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정상으로 되돌리라.

답은 간단하다. 현장에 자율성을 부여하면 된다. 권한과 책임을 현장에 주고, 현장의 조치와 결과를 신뢰하며, 결과를 빌미로 현장근무자에게 책임을 떠 넘기고 처벌하는 마녀사냥 행태를 근절해야 함은 물론이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현장이 중요하고, 현장에 답이 있으니 현장에 가라고 말 하면서 실제로는 현장을 무시하는 행태가 문제의 원인이며, 현장 경험없이 탁상공론에 의존하는 상급자나 상급기관의 지휘와 감독에 의하여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생각이 혁신의 대상이다.

#1

2002년 8월 30일 태풍 루사로 인해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었다. 당시 고성경찰서 경무과장이었던 나는 마침 전국 공무원 컴퓨터 능력 경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박기선 서장(현 파리 주재관)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다.

밤 11시경 간성읍내 파출소를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침수되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한 것은 전신전화국 침수였다. 전화국 건물이 완전히 침수되는 바람에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상부로의 상황보고는 물론, 가족과의 연락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태풍 루사로 강릉도 이 꼴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아침, 한 직원이 헐레벌떡 나에게 달려오더니 “과장님, 우리 여직원 019전화가 외부와 연락이 됩니다”라며 지방청과 연락이 두절 상태인데 이 전화를 보고용 전화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다른 전화는 모두 불통인데 019는 통화가 되었다. 당시 011이나 016 전화 등과는 달리 019는 시골 지역에 별로 알려지지 않아 고성군을 통 털어도 몇 대가 되지 않아 매우 귀한 전화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 반대의 조치를 취했다. 여직원 휴대폰으로 지방청과 통화를 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아울러 외부와 통화가 된다는 사실을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지방청에서 알지 못하도록 전 직원에게 보안을 유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지방청에서 019로 통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온갖 불필요한 보고를 위한 보고를 요구할 것이고, 한 사람 궁금증 풀어 주는 일 이외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보고자료 챙기느라 현장 수습과 주민 구호 등 정작 해야 할 일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외부와 통신이 두절된 이틀 동안 공무원 컴퓨터 경진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던 중 산사태로 발이 묶였던 박기선 서장이 진부령을 걸어 청사로 돌아 올 때까지 고성경찰서 경찰관들은 상부의 불요불급한 지시와 보고로 인한 업무방해 없이 경찰관으로서 해야 할 조치와 치안서비스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만약 통신이 두절되지 않았다면, 쏟아지는 상급기관의 보고요구로 인해 정상적인 조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고가 최소화되면 업무 효율은 반비례하여 최대화된다.

#2

강릉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2012년 8월 6일 밤, 경포해수욕장에서 음주규제 근무를 하고 있던 중 강릉시 옥천동 소재 한 가구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머리 속이 온통 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백사장을 내 달려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는 이미 지역경찰과 형사들이 교통통제, 현장보존, 감식, 주변 수색 등 역할을 분담하여 체계적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켜 본 우리 형사들의 경험과 판단은 정말 값진 것이었다. 나도 사건 해결에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사건지휘에 나섰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절감했다.

오히려 사건 수사의 문외한인 서장의 지시로 인해 수사 진행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컸다. 경험으로 무장한 형사들의 판단이 더 정확했던 것이다. 그 이후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고 형사들의 수사진행을 지켜보기로 했다.

형사들은 사건 발생 신고를 접수한지 2시간 50분이 경과한 새벽 1시 30경 피의자를 특정했고, 02:25분경 피의자를 검거했다.

사건 해결을 지켜보면서 절감한 것은 현장 경험의 소중함이었다. 어떤 지식도 경험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상식의 재확인이었다. 관리자들이 특정한 사건에서 해야 할 일은 불요불급한 간섭과 신속한 보고 요구가 아니라, 현장 근무자들이 자율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과 격려로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현장에 권한을 주고, 현장의 판단을 존중하며, 결과를 문제 삼아 현장을 정치적 제물로 삼지말고 현장을 지원하라. 아울러 보고를 위한 보고로 현장을 닥달하지 말라, 그것이 혁신이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6. 13. 19:21 생각 메모
애플을 품은 별

posted by 시골남자
2014. 6. 6. 00:37 생각 메모



선거에서 공약집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나도 꼼꼼히 공약집을 살펴보고 골랐지만,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당선인의 공약집을 두고두고 보며 공약을 지키는지 어쩌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되는데, 그럴 여유나 시간, 아니 관심이 있는가?


투표를 할 때 그 후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말로, 공약으로 좋은 말 못하는 사람이 있나?

결국 사람은 살아온대로 살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후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옳은 투표라고 본다.


조희연 교육감을 보며 헌신이라는 단어를 새삼스래 떠올린다.

모임에서 정말 많이 들었던 단어인데.

삶의 헌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다시 살려야 겠다.


*첨언을 하자면 시장, 군수 선거보다 교육감 선거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정말 잘 뽑아야 한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5. 5. 23:51 생각 메모

지난주 토요일, 자주 가는 시골가게에 나들이겸 놀러갔다. 한적하고 조용해서 종종 놀러가던 곳이다.

그런데 가게에 거의 다다르자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것이었다. 왕복 2차선 도로 양 옆으로 차들이 길게 주차되어 있어 1차선 도로로 변해버렸다.


[차에 비친 햇빛을 찍기 위한 사진인데, 이런 식으로 차가 길게 주치되어 있었다.]


평소 한산하던 이 곳의 처음 보는 풍경에 신기해 하며 마침 한 자리 남은 곳에 주차하고 가게로 걸어갔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결혼식이 있는 것이었다. 

야외 결혼식, 사실 이곳이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거나, 공간이 넓은 장소가 아닌데 특이하게도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근처 학교 선생님이 결혼하시는 모양이었다.

이 지역은 뜻이 있어 귀농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기농, 자연주의 이런 것에 주관이 뚜렸한 사람들이 모여 한다. 때문에 그런 마인드를 담은 학교도 지어서 운영하는데, 그 학교 선생님이 결혼하시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미리 사온 밥버거를 먹으며 구경하였는데, 색다른 풍경에 사람들도 북적이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식을 보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었다. 지인들이 두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고, 축가는 학생들처럼 보이는 아이가 잘 부르진 않았지만 연주에 맞춰 부르고. 그 장면들이 참 좋아 보였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나는 왜 결혼할 때 그렇게 경직되게 딱딱하게 틀에 박혀 했을까?' 였다.

어차피 결혼은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결혼식은 그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자리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순서가 무에 중요하고 형식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축가는 못 부르면 어떻고, 실수하면 어떠겠는가? 즐거우면 그만이지. 결혼하는 부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신랑이나 신부도 와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그렇게 즐겁게 식을 치루면 되는 것인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처음하는(?) 결혼식인지라 남들하는데로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결혼식을 해치울(?) 것이다. 결혼식을 두번하지 않고서야 그런 여유와 자유로움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결혼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이런 생각을 좀 전해 주어야 겠다.

하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고 나야 내가 해주는 말도 이해가 될 것 같다. 사람 사는게 다 그런게 아니겠는가?

살면서 형식이 중요할 때가 있지만, 또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그 의미를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본질을 잊지 말고 살 아야 겠다.




posted by 시골남자
2014. 5. 4. 12:50 생각 메모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우는데는, 부모가 있으면 되는게 아니라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

사회 시스템적인 요소들이 갖추어져야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야 아이를 건강하게 기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런 곳에 관심이 별로 없는 듯하다.
posted by 시골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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